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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티퍼트롤]요식업소 실내금연 지켜야

    2023.11.09 by 타임스페이스

  • [시티퍼트롤] 패가망신 부르는 폭음문화

    2023.11.09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1000명을 만나고, 5600편을 쓰고

    2023.11.06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이민사 웹사이트를 살리자

    2023.11.06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한국까지 가서 확인한 K-팝의 실체

    2020.07.09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전화 회사를 바꾸다

    2020.06.28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중국이나 한국이나 '오십보 백보'

    2020.06.28 by 타임스페이스

  • [중앙 칼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2020.06.20 by 타임스페이스

[시티퍼트롤]요식업소 실내금연 지켜야

10여년전 한국서 대학 프레시맨 시절 강의실 복도에서 남자 선배들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토론을 벌이던 여자선배를 보고 자유로운 대학의 공기가 담배를 피우기에 매우 알맞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흡연행위가 성숙과 자유를 상징하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특히 미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금연법 실시는 물론 주정부들이 나서서 담배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보상금을 담배회사들로부터 받아내는 형국이니 여러모로 흡연자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는 상황이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법으로 제한받기 시작한 이후 지금은 술집에서 조차 금연법이 시행되고 있어 흡연이 무슨 범죄행위인양 느껴질 때가 많다. 이쯤되자 금연법망을 피하려는 묘한 옥외시설물(카페식)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국의 허가상으로는 "옥외"로 담..

LA한인사회 2023. 11. 9. 18:39

[시티퍼트롤] 패가망신 부르는 폭음문화

지난주 내내 본국 신문과 PC통신을 장식했던 가장 뜨거운 뉴스는 소위 386세대 젊은 정치인들의 단란주점 술잔치였다. 사건의 요지는 386세대로서 4월 국회의원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된 젊은이들이 5ㆍ18광주 민중항쟁 2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를 위해 광주에 모였다가 술대접을 받았는데 그날 이자리에 들렀던 같은 학생운동권 출신 임수경이 이를 인터넷 등에 써올림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며칠뒤 역시 국회의원선거에서 시민연대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장원교수도 뜨거운 뉴스의 소스가 됐다. 부산지역에서 강연회를 하고 이메일로 사귀었던 어떤 아가씨를 호텔방에서 기다리게 한후 이 여성을 추행했다는 것이다. 장교수는 졸지에 쥐구멍을 찾아야 하는 파렴치범이 됐고 “그저 어깨만 걸쳤다”는 기이한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작년엔 진..

LA한인사회 2023. 11. 9. 18:36

[중앙 칼럼] 1000명을 만나고, 5600편을 쓰고

중앙일보 기자들이 매달 한 편의 칼럼을 쓰게 된 것은 20년도 넘은 일이다. 취재로 바쁜 기자들에게 월말 시험이나 과제물 내는 것 같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취재하는 사안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훈련의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단순히 기자로서가 아닌 저널리스트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특히 기자들에게 미국사회와 한인커뮤니티 전반에 걸친 의견과 주장을 발표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모든 기자가 칼럼을 쓰기 시작할 때에 평기자는 ‘시티퍼트롤’을 칼럼명으로 펜을 들었다. 차장부터는 ‘마감24시’, 부장부터는 ‘중앙칼럼’, 또한 논설실 위원들은 특정 문패를 만들어 칼럼을 써왔다. 대략 20년간 취재기자를 해 온 경우, 약 240편이 넘는다..

LA한인사회 2023. 11. 6. 14:46

[중앙 칼럼] 이민사 웹사이트를 살리자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올드타이머의 별세 소식을 자주 듣는다. 지난 26일 유명을 달리 한 김지수 전 한미교육재단 이사장도 그 중 한 분이다. 지난 2009년 그를 인터뷰할 때가 기억이 난다. 한인 이민사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김 이사장을 수소문 끝에 만난 것이다. 전에 민족교육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서 활동했던 그는 당시 민족교육관이 이름을 바꾼 한국교육원을 운영하는 한미교육재단에서 봉사 중이었다. 그의 이력을 잠시 돌아보자. 1963년 이민온 후 1976년 한인회 이사 상공회의소 부이사장 1985년 남가주 한국학원 이사장 1988년 서울 올림픽 재미동포후원회 자원봉사위원장을 역임했다. 또 1992년엔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1996년 남가주 한국학원 이사장을 다시 맡으면서 민족교육관 건립..

LA한인사회 2023. 11. 6. 11:50

[중앙 칼럼] 한국까지 가서 확인한 K-팝의 실체

여의도 TV 공개홀서 외국인 방청객들 열광 세계의 한류 열풍 실감 지난 7월 8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KBS TV 공개홀을 방문했다. 1주일에 한 번씩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방청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해나 몬태나'에 열광했던 큰 딸이 'K-팝'의 중심인 '뮤직뱅크' 방청을 한국 방문 중에 꼭하고 싶은 것으로 꼽아 신기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여의도를 찾은 것이었다. 공개홀 앞에서는 이미 수 많은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젊은 아줌마 머리카락 색깔이 금발인 젊은이들 우리 가족같이 미국에서 휴가를 맞아 온 일가족들 아이패드2를 들고 중국에서 온 중국동포 가족들 등 방청객은 매우 다양했다. 물론 책가방을 둘러맨 한국 고교생들도 눈에 ..

LA한인사회 2020. 7. 9. 09:40

[중앙 칼럼] 전화 회사를 바꾸다

최근 10여 년 넘게 사용하던 셀폰 서비스 회사를 바꿨다. 특별히 서비스가 나빠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진 것도 아니기에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용단(?)을 내렸다. 원래 회사는 10여년 전 한인들이 운영하는 셀폰 대리점을 통해서 가입했었다. 그 당시에는 한인 에이전트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셀폰 메이저 회사들은 가입된 한인 사용자들의 계약을 직접 맡아 하면서 에이전트들의 역할을 빼앗았다. 현재 한인타운에서 셀폰 에이전트를 찾으려면 손꼽을 정도가 된 이유다. 에이전트가 별로 없으니 새로 옮겨간 셀폰 회사와의 계약은 전화로 이뤄졌다. 아쉽게도 한국어 서비스는 없었고 영어로 가입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으면 한인 가게에서 1시간 정도 걸리면 가능했던 일이 전화로는 무..

LA한인사회 2020. 6. 28. 07:54

[중앙 칼럼] 중국이나 한국이나 '오십보 백보'

리조트 호텔 뷔페식당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에서는 손님들이 먹고 놔둔 빈 그릇을 치우느라고 분주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한국 아주머니가 입맛에 맞지 않아 삶은 달걀로 점심 식사를 대신해야겠다며 달걀 3개를 자신의 핸드백에 집어 넣고 있었다. 그리곤 지금 먹겠다며 2개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 순간, 마침 옆을 지나가던 식당 매니저가 조용히 다가와 그 아주머니 핸드백에 손을 넣는 것이 아닌가. 매니저는 핸드백에서 3개의 달걀을 꺼냈고 테이블 위 2개까지 모두 5개의 삶은 달걀을 웨이터를 불러서 원래 음식이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머니도, 매니저도, 심지어 기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난 14일 중국 베이징 인근 온천 리..

LA한인사회 2020. 6. 28. 07:36

[중앙 칼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설립한 토머스 정(한국명 정용봉) 회장을 최근에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전 당시 육군 소위로 참전하고 제대 후 미국에 와서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기업인이다. 그가 쉬워 보이지 않는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다름아닌 조창호 소위 때문이다. 조 소위는 한국전 당시 포로로 잡혀서 탄광 등지에서 평생동안 노동만 하다가 1994년 탈북해서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조창호 소위 이후로도 총 80명이 탈북해 귀환했다. 정 회장은 만약 그런 상황에서 조창호 소위가 아니고 정용봉 소위였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정 회장은 운이 좋아 미국까지 와서 사업을 했지만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면 평생을 북한 탄광에서 석탄이나 캤을 것이라는 얘기다. 솔직히 자..

LA한인사회 2020. 6. 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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