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칼럼]김 사장님의 은퇴가 안타까운 이유
"김 사장님, 이번에 '윌셔밸리'를 중심으로 한인 벤처 사업가들의 모임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사장님이 앞장서 주시면 좋겠습니다."
"장기자, 그런 모임은 만들어서 뭐하게?"
"네? …그게…제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모여봐야 별 도움이 안될 거예요. (나도 나름대로 바빠!)"
15년 전 김 사장님과 가졌던 통화 내용이다. 한때 LA한인타운 윌셔가를 우리(?)끼리는 '윌셔밸리'라고 불렀다. 윌셔 불러바드의 '윌셔'와 실리콘밸리의 '밸리'를 조합한 합성어다. 당시 윌셔가의 사무실엔 적게는 몇 곳, 많게는 10여 곳씩 소위 벤처회사들이 대박의 꿈을 꾸며 24시간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에 붙였던 이름이다.
당시 중앙일보는 벤처붐을 타고 '머니'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주간 독립 섹션지면을 내놓았다. 한인들의 벤처 스토리와 주류사회의 벤처 스토리를 다루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고 있던 시절이다. 당시 벤처로 자리를 잡은 김 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던 '오합지졸' 벤처인들을 모아서 네트워킹을 하면 실리콘밸리의 한인 네트워크 못지 않은 윌셔밸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기에 내놓았던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직도 장 기자는 '더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그 후 닷컴은 무너졌고 야후는 쇠퇴했다. 그 와중에도 웹 2.0이 나왔고 구글은 성공했으며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대박을 쳤다. 그러는 동안 윌셔밸리의 한인 벤처들은 모두 문을 닫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는 '우리'끼리도 언제 윌셔밸리라는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최근 한인타운에 닷컴 열풍에는 못미치지만 그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에도 웹 2.0이 유행하면서 닷컴 때와 유사한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상황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우선, '벤처'라는 단어는 40대 이상만 쓰는 것같다. 요즘은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벤처사업을 한다'는 표현대신 '스타트업을 한다'고 말한다. 또 예전에는 웹으로 서비스를 하거나 거래를 하려고 노력했다. B2B, B2C라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반면, 지금은 모바일 환경에 O2O(온라인 투 오프라인)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사물인터넷(IoT)이 상식이 됐다.
성공의 개념도 조금 달라졌다. 당시에는 사용자를 1명당 2000달러로 계산하는 엄청난 산정방법이 이용됐다. 벤처의 첫 목표는 IPO(주식상장)를 통한 부의 창출이었다. 이제 스타트업의 성공은 사용자 숫자보다는 수익과 부의 창출을 통한 수익 극대화로 바뀌었다.
며칠 전 한인타운 중식당에서 스타트업을 꿈꾸는 한인들이 모임을 가졌다. 10여 년 전 장 기자가 김 사장님을 잘 설득했으면 열렸을 수도 있었을 모임이었다.
닷컴 열풍이 불었을 때는 아직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가 없었기에 참가자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오프라인 모임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끊임없이 시도됐던 스타트업의 불씨가 이제 슬슬 불이 붙는 것처럼 보여 매우 긍정적이다.
지난 해에는 한인타운에서 스타트업을 꿈꾸는 인큐베이터 코랩스(KOLABS)가 문을 열었고 성공한 한인 벤처모임인 K마피아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스타트업을 꿈꾸는 한인 젊은이들의 경연대회인 스프링보드 행사가, 11월에는 한국 스타트업을 상대로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에서 경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럼 예전에 장 기자의 제안을 단번에 묵살했던 김 사장님은 어디에 계실까.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는 이번 '창업붐'이 시작되기 직전 그나마 비즈니스를 그만두고 아주 은퇴해 버렸다.
[LA중앙일보] 발행 2016/02/20 미주판 8면